‘여자축구 1세대’에서 ‘WK리그 감독’으로, 유영실-송주희 감독 이야기 ①

202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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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EAFF 여자축구 선수권대회 우승 당시의 유영실(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송주희(오른쪽에서 네 번째). 

1990년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여자축구 1세대가 나아간 모든 발걸음은 말 그대로 개척이었다. 황무지를 개척해나가며 꿈을 키웠던 여자축구 1세대는 이제 WK리그의 감독으로서 또 다른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지난 10일 경주황성체육공원 3구장에서 열린 경주한수원과 서울시청의 WK리그 경기는 그래서 특별했다. 여자축구 1세대로 함께 활약한 송주희 경주한수원 감독과 유영실 서울시청 감독의 시즌 첫 번째 맞대결이었기 때문이다. 두 감독 모두 지난 시즌부터 WK리그 감독을 맡아 올해 2년 차를 맞이했다. 시즌 첫 번째 맞대결은 경주한수원의 승리로 끝났다.

 

여자축구 1세대의 인생은 곧 여자축구의 역사와도 같다. 두 감독의 삶을 통해 지난 여자축구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편에서는 선수로서의 삶에 대해 들었다.

 

창단과 함께 시작한 축구

 

유영실 감독과 송주희 감독 모두 여자축구부 창단과 함께 축구를 시작했다. 두 감독의 시작은 모두 1991년이었다. 유영실 감독은 처음부터 축구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배드민턴 선수였다. 소년체전도 나갔다. 중학교 진학하면서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려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침 고등학교 1학년 때 광양여고 축구부가 창단했다. 그 소식을 듣고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오빠랑 손을 잡고 테스트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테스트에 통과해서 그해 2학기부터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유영실 감독처럼 다른 종목 선수가 새롭게 창단된 축구부로 옮겨오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송주희 감독은 다른 종목 경험 없이 바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축구를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다. 남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축구를 시키셨다. 창덕여중 축구부가 창단했다는 기사를 보시고 바로 나를 데리고 테스트를 보러 갔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 송주희 감독은 “당시에 축구를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권하시니까 ‘해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반강제적이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2001년 울산에서 열린 토토컵 국제여자축구대회 일본전에서 활약하는 유영실. 

국가대표의 시작

 

두 감독은 모두 고등학생 시절부터 국가대표 생활을 했다. 유영실 감독은 축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는 “여자 선수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다 비슷한 시기에 축구를 시작하다 보니 실력도 비슷했다. 나는 어릴 때 남자아이들과 뛰어 놀아 그런지 운동신경이나 창의성 같은 것이 좀 더 눈에 띄어서 국가대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송주희 감독은 “고등학생 때 축구에 본격적으로 흥미를 느끼면서 열심히 했다. 나도 몰랐던 승부욕을 발견하기도 했다. 당시 위례상고 감독님이었던 서정호 감독님 밑에서 동기부여도 많이 받고 잘 성장했다. 스스로도 이제 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과 달리 상비군에 한 번 못 갔다. 감독님이 엄하시고 칭찬도 잘 안 해주셔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국가대표 감독님께 나를 상비군을 거치지 않고 한 번에 국가대표팀에 올리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좋은 선수로 키워내시려고 많이 애써주신 것 같다. 덕분에 거의 바로 국가대표에 합류하게 됐다. 잘된 케이스였다”고 밝혔다.

 

선수 유영실과 송주희, 인연의 시작

 

두 살 차이인 두 감독은 국가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같은 경희대에 진학하게 되면서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됐다. 유영실 감독은 “나름대로 코드가 잘 맞아서 절친한 사이였다. 선후배를 넘어 언니동생 할 정도로 친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지도자로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는 “나는 표출하는 스타일의 리더십이 있다 보니 지도자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지도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다. 그런데 송주희 감독이 지도자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송주희 감독이 승부욕이 있는 건 알았지만 리더십도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송주희 감독도 동의했다. 그는 “유영실 감독은 분명히 지도자가 될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지도자가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지도자를 하게 된다면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영실 감독에 대해서는 “나한테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선배였다. 축구를 너무 잘하는 선수였고,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사적으로도 잘 맞아서 평소에도 의견을 많이 나눴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2003 AFC 여자축구 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고 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했던 당시의 모습. 

2003년, 여자축구 첫 번째 전성기

 

두 감독이 함께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2003년에는 굵직한 사건이 많았다. 6월 태국에서 열린 AFC 여자축구 선수권대회(현 AFC 여자 아시안컵)에서 3위를 기록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국가대표팀은 조별리그 A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뒤 준결승전에서 아쉽게 중국에게 패했지만, 3/4위전에서 일본을 1-0으로 꺾으며 3위를 기록했다. AFC 여자축구 선수권대회는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겸했기 때문에 3위를 기록한 한국은 FIFA 여자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획득했다. 한국 최초의 여자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유영실 감독은 AFC 여자축구 선수권대회를 가장 잊지 못할 기억으로 꼽았다. 그는 “당시 남자 국가대표팀이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덕분에 월드컵 본선행이 걸려있는 대회에 출전하는 여자 국가대표팀도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관심뿐이었다. 기대는 없었다. 당시 한 기자님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목표는 뭡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생각난다. 그런 시선에 오기가 생겼다. 그 질문에 ‘자신 있다. 한 번 보시라. 말은 필요 없다’고 대답했었다”며 웃었다.

 

유영실 감독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왠지 자신이 있었다. 느낌도 좋았고, 훈련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당시 선수들 구성도 좋았다. 일본이 우리보다 기술이나 경기운영은 한 수 위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정신적인 측면은 더 강했다. 그때는 일본 선수들보다 우리가 신체조건도 더 좋았다. 조직력을 키워서 나가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신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일본을 상대로 사상 첫 승리를 거두며 월드컵 본선 진출까지 이루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유영실 감독은 이 경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영실 감독은 “전반 20분이 되기도 전에 선제골을 넣었다. 지금 국가대표팀 코치인 황인선 선수가 코너킥 상황에서 흘러나온 공을 차 넣었다. 너무 기쁘기도 했지만, 시간이 많이 남아서 걱정이 몰려왔다. 그래도 무사히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갔는데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박은선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 두세 명이 붙어서 견제를 하니 혈기왕성했던 박은선이 순간 감정 컨트롤이 안돼서 퇴장을 당했다. 후반전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장당한 거라 남은 시간이 많았다. 그 40분을 버텼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고 말했다. 

 

11대11로 싸워도 버거운 상황에서 찾아온 위기였지만 한국은 마침내 소중한 한 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유영실 감독은 “공격이 끝없이 쏟아졌다. 그래도 공은 하나니까, 정말 집중해서 잘 막아냈다. 쉽지는 않았지만, 충분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때는 그게 되더라. 아마 일본도 놀랐을 거다. 한국의 수비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기뻤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때 내가 센터백이었고, 송주희 감독이 왼쪽 윙백이었다. 다른 수비수들도 있었지만 송주희 감독과 가장 호흡이 잘 맞았다. ‘저쪽!’, ‘나가!’ 이러면서 목이 터지게 수비 지시를 하던 게 생각난다”며 웃었다.

 

기적처럼 출전한 여자 월드컵이었지만 세계무대의 벽은 높았다. 2003 FIFA 미국 여자 월드컵에서 브라질, 노르웨이, 프랑스와 한 조였던 한국은 강팀들에 전패를 당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두 감독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관중’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이 첫 경기를 치렀던 미국 워싱턴DC RFK스타디움은 4만5천 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송주희 감독은 “그때 우리는 미국 동부에 머물고 있었는데, 같은 호텔에 축구를 보러 서부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것부터 충격이었다. 경기장에 들어가서는 더 했다. 꽉 찬 관중에 시각적, 청각적 충격이 너무 컸다”고 밝혔다.

 

유영실 감독 역시 “관중이 너무 많다 보니 문화적인 충격이 있었다. 이전에는 동료들끼리 소리를 지르면 들렸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안 들리더라. 소통도 전혀 안되고, 후배들은 얼어버리고... 선수 구성이나 컨디션은 다 좋았는데 그렇게 큰 무대 경험이 없다 보니 주눅이 들었다. 경험이 없어서 무너진 것 같다. 너무 촌스럽고 순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3년 AFC 여자축구 선수권대회 일본과의 3/4위전에 나선 송주희.


2005년, 동아시아 제패

 

2005년 여자 국가대표팀은 한국에서 열린 EAFF 여자축구 선수권대회(현 EAFF E-1 챔피언십)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동아시아 여자축구를 제패한 순간이었다. 유영실 감독과 송주희 감독은 국가대표팀의 베테랑으로서 우승을 이끌었다.

 

송주희 감독은 “월드컵에서 쓰린 패배를 하긴 했지만 배운 게 많았다. 시야가 확장되기도 했고, 생각의 전환도 됐다. 팀워크나 응집력, 책임감 등 정신력이 정말 좋아졌다. 분위기도 좋았다. 성적을 내다보니 합숙 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이 제공됐고, 처음으로 주요 스포츠 회사와 스폰서십도 맺었다”고 말했다. 그는 “월드컵 때는 경험이 없어서 대패를 했다면, 동아시아 대회 때는 월드컵에서의 대패가 경험이 돼 우승이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유영실 감독은 “당시 주장을 맡았다. 말로는 잘 표현 못 하지만 당시에 따뜻하게 마음을 나누는 팀, 하나 된 팀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막내였던 박은선을 각별히 챙기기도 했다. 잔소리처럼 들렸겠지만 잘 따라와 준 덕분에 매번 좋은 경기를 했다. (안종관)감독님도 운동장에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게 해주신 덕분에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수 생활의 마침표

 

유영실 감독은 2008년 대교캥거루스(해체)에서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서른넷에 은퇴를 했다. 사실 더 뛰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빠른 시기에 은퇴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사회적으로도 노장에 대한 대우가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다 됐다’, ‘여자가 서른넷이면 힘들다’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굉장히 고독했다”고 말했다. 유영실 감독은 “지도자 선생님들도 세대교체를 하길 원하셨던 것 같다. 소외된 느낌도 많이 받았고 스트레스가 심했다. 사실 더 하려면 할 수는 있었지만 축구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퇴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송주희 감독은 2009년 충남일화(해체)에서 은퇴를 했다. 그는 “그해에 결혼을 했다. 나는 운동을 한 번도 그만두지 않으면서 실업 생활을 하고, 결혼까지 한 첫 주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답답하지만 그때는 한 남자의 아내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0년 넘게 축구를 했는데 한 번도 쉬질 않았으니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은퇴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영실 감독과 송주희 감독의 선수 생활은 다른 듯 닮은 점이 많았다. 두 감독은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 있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그라운드를 누비며 승리를 위해 달렸다. 여자축구 1세대의 선수 생활은 끝났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축구인으로서의 삶이 남아있다.

 

2편에 계속.

 

글=성의주 KFA 인턴기자

사진=대한축구협회



송주희(왼쪽)와 유영실이 2003년 AFC 여자축구 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나란히 앉아 해맑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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